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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유래

    본문

    3. 본국검의 발달

     

    1) 삼국시대

     칼에 관한 고대 기록은 다양하게 발견된다. 고구려의 기록으로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아버지의 부러진 칼을 가지고 신표로 찾아 도는 기록과 말을 타고 있는 부여광의 목을 베었다는 검의 고수 괴유의 기록 등으로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무술 수련을 위하여 마을에 경당을 두어 어린이, 청년들의 무술을 수련하게 하여 전쟁을 대비하였다. 고구려는 환두대로를 사용하였고 삼국 중에서 무예가 가장 발달하였다. 또한 선배제도가 있어서 군중들을모아 칼, 환, 깨금질, 가무, 수렵을 통하여 승리한 자를 선배라 칭하였으며 나중에 백제의 무사단과 신라의 화랑제도에 큰 영향을 미쳤고 「조의선인」이라고 칭하였다.

     「을파소(乙巴ㆍ?~203)는 국상이 되더니 나이 어린 준걸들을 뽑아 선인도랑이라 하였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衣)라 하였으니 바른 행동을 거듭하여 규율을 만들고 공동을 위하여 몸을 바친다…. 삼한의 통속도 역시 오계가 있어 효(孝), 충(忠), 신(信), 용(勇), 인(仁)이라하였다.」

    * 조의(?衣) : 검은색, 조색이라는 뜻. 조의선인은 화랑의 원류로 한국선가의 표본.

     백제는 가야와 더불어 일본의 검법과 검 기술을 전수시킨 장본인으로 환두대도를 사용하였으며 무사도정신이 뛰어났다. 특히 일본의 무사를 일컫는 사무라이의 기원인‘싸울아비’가 백제의 무사였다. 싸울아비는 전투하는 남편 즉 ‘무사’를 일컫던 백제의 말이었다.

    일본의 무사도 정신이 말하던 그 기원인 백제의 무사도 정신은 나라에 대한 충성과 굴복하지 않는 정신,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정신등이 백제인의 가슴에 항상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대표적이 예가 계백의 황산벌 전투를 통한 죽음이라 할 수 있다.

     백제시대에는 환두대도의 기록이 많이 있지만 검의 유물은 거의 없는 편이다. 백제는 나라에서 무기를 제작하는 도부(刀部)를 만들어서 칼의 제작과 개발에 힘을 기울였으나 전해지는 것은 몇 자라의 검과 또 다른 하나는 칠지도(七支刀)이다.

    칠지도는 일본 석상신사에 소장되어 있다. 칠지도는 칼날에 명문이 새겨진 칼로서 일본 태본현 선산고분에서출토되었는데 금상감(金像嵌)명문(銘紋)과 증화(繒畵)적인 모양이 새겨진 대도이다. 칼날의 전체길이는 75cm이고 손잡이의 길이는 9cm이다. 칠지도는 칼날에서 좌우로 3가지와 4가지, 합 7개의 가지가 뻗어 나와 있다.

     도신의 표면에는 금상감 명문이 있어 백제에서 제작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일본서기》의칠지도에 관한 기록과 일치되고 있다

     칼날 명문의 겉의 내용은 「태화4년 11일 정오에 백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는 나아가 백병을 물리칠 수 있으며 마땅히 후왕들에게 공급 할만하다 하여 제작함.」이고 안의 내용은 「선세이래로 아직 이런 칼이 없었던 것인데, 백제 왕세가 성스러운 일이 생긴 고로 왜왕 지를 위하여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해 보라.」이다.

     여기서 태화 4년은 동진의 연호이며 서기 369년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백제 근초고왕의 재위 때로 백제의 국력이 절정기였던 시기에 칠지도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보내진 것이다.

     신라는 작은 영토의 취약한 국가였으나 화랑도(花郞道) 정신이 근간을 이룬 풍월도(風月道)와 선(仙)사상으로부국강병을 추구하여 나중에는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 화랑도는 산천을 수련장으로 오대계율을 생명 삼아 인(仁), 의(義), 예(禮),지(智), 신(信)정신으로 검법과 격검을 중심으로 수련하여 나라를 부흥시켰다. 본국검법도 화랑의 수련과정에서 체계화된 검법에 기인하여 발전한 것이다.

     신라의 칼은 고구려의 환두대도와 가야의 작은 칼이 합쳐져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고분의 부장품으로나오는 목검은 수련용으로 격검의 흔적이며, 금검은 신분의 상징으로 의식이나 제례용인 것이다.

     삼국시대 초기의 칼은 칼 몸의 넓이가 넓고 길이가 길며, 무게가 무거운 검에서 점차 좁아지고가벼워지는 경향이 있다.

     삼국시대 중반으로 가면서 칼은 장식품을 겸하게 되는데 칼자루와 칼집을 장식하게 되었다. 칼집에는 주로 칠과 여러 가지 문양을 새겼고 칼자루는 자루에 감는 실과 자루의 끝부분인 파두에 여러 가지 조각적인 장식을 하였다. 그 종류로는 환두대도, 방두대도, 소환두대도 등이 있으며 초기에 가장 많이 성행한 것이 환두대도이다.

    환두대도는 자루머리가 큰 고리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고리를 둘러싸는 것은 여러 가지 동물의 입이나 용의 입부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장식의 구멍의 본래 목적은 끈을 묶어 전투 시 끈을 손에 감아 검을 놓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기능이 차차 면하여 수술이나 깃털 등을 다는 장식용으로 발전하였다.

     방두대도는 칼자루 끝부분이 각진 사각 모양으로 동이나 철로 단순히 만든 것으로 이는 칼자루를 튼튼히 하거나 타격용으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소환두대도는 자루 끝부분에 고리가 있으나 장식이 거의 없는 것이다.

     삼국시대의 우리나라 철 기술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뛰어났으며 이는 경주의 에밀레종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지금의 과학기술로는 만들기 어렵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뛰어난 철을 다루는 기술로 칼을 제작한 삼국시대의 선조들은 이를 일본에 문화와 함께 전파하여 지금의 일본 재검 기술의 시조가 되었다.

     

    2) 고려시대

     통일신라의 정치와 문화를 계승한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자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지금의 평양에 서경(西京)을 설치하여 이를 북방개척의 기지로 삼아 북방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 역시 통일신라의 문화를 계승함으로써 도검의 제조술과 검법의 기법도, 신라와 유사했으며 고구려무예, 신라의 무예, 백제의 무예등의 삼국의 독특한 무예 기법이 국가의 통합과 함께 어우러져 다양한 방법으로 접목되어 발전되어 왔다.

     고려시대에 평소 많이 사용했었던 무예는 수박(手搏), 궁술(弓術), 격구(擊毬), 검술(劍術)등이있다.

    《고려사》에 전하는 기록을 살펴보면 최충헌전에 「명종4년 사람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어 중방의 힘센자들로 하여금 수박하게 하여 승자는 곧 교위 재정을 주어 상 주었다.」

     이 수박은 맨손무예로서 전투 시 백병전에 많이 사용하며 평시에는 민속경기 형식으로 성행하였으며, 검술을 연마하기 전에 맨손무예를 행하여 기본체력을 향상시키고, 검을 잡고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본적인 기법을 습득하는데 꼭 필요하므로 그 당시 고려 사람들은 검술 수련을 병행하여 많이 익혔다.

    또 고려시대 궁술의 발달은 그 시대 검술의 발달 과정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써 궁술은 검술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무술인 것이다.

     그리고 격구는 신라시대에 처음 시작되었고 고려시대에 성행하였으며, 조선시대까지 계속 전해온 무예의 하나이다. 이것의 경기방식은 동ㆍ서양 편으로 편대를 나누어 말을 타고 몰면서 작대기로 공을 쳐서문을 통과시키는 경기인데 말은 타거나 그냥 뛰면서 하는 두 종류가 있었으며, 이 격구는 평시에는경기형식으로 행하여 졌지만 전시에 전투에서 적과 싸울 때 검과 창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기 위한 훈련법의 하나였던 것이다.

     따라서 수박, 격구 등은 모두 다 전시에 검술과 창술은 잘 쓰기 위한 보강 수련의 방법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고려는 통일신라의 문물이 전해졌으므로 당연히 고구려, 신라, 백제의 검 제조술이 고려로 도입되었으며삼국시대의 검 제조술보다 가일층 발달하였다.

     또 검의 형태는 시대가 흐르면서 그 모양이 시대의 사용 용도에 알맞게 발달하였다. 삼한시대의 칼 모양은 환두대도의 형태였으며 검 날이 일자형으로 만들어 졌고 검의 날과 등의 구별이 없는 양날검의 형태였으나, 신라시대 이후부터 고려시대로 이어오면서 칼의 등과 날이 구분되는 도(刀)의 형태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것은 검술의 기법이 발달되면서 그 기법에 알맞게 사용하기 위해 검의 형태도 변화하였던 것이다.

     중국의 송나라 때 시신인 서긍이 고려에 와서 보고 지은《고려도경》에 보면 고려시대의 검의 발달 형태를 잘 알 수 있다.

    패검(佩劍)의 장식은 모양이 길고 예리하며 백금과 검은 물소뼈를 썩어 만들었다. 바다상어 가죽으로칼집을 만들고 곁에 고리를 만들어 색끈으로 꿰거나 혹은 혁대(革帶), 상옥체, 봉필(捧珌)등속으로 하니 역시 옛날의 유제(遺制)이다. 문위교위(門衛校尉)와 중검랑기(中檢郞騎)가 모두 찼다.

     고려시대에는 검에 치장을 매우 모양 있게 했으며 이러한 치장으로 신분의 상징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필(刀筆)을 차고 다녔다.

     도필이란 것은 칼과 붓을 꽂는 나무로 만든 집이다. 그 모양새는 세 칸인데 그중의 하나는 붓을 꽂고 그 중의 둘은 칼을 꽂는다. 칼은 튼튼하고 잘 들게 생겼는데, 칼 하나는 약간 짧다. 산원(散員)이하의 관리와 지응(祗應), 방자(房子), 친시(親侍)가 그것을 찬다.

     이 도필은 신분이 낮은 방자나 일정한 임무가 없는 관원, 심부름하는 집사 들이 차고 다녔다. 그러나 칼 제조술이 뛰어나 잘 만들어 졌다고 하였으므로 고려시대의 칼 제조술이 상당히 발달되었다는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3) 조선시대

     조선(朝鮮)을 개국한 이성계는 무인(武人)으로서 명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조선 초기에는 격검이 성행하였으며, 이것은 조선 말기까지 전승되었지만 조선의 숭문천무사상으로 인하여 검술과 무예의 발전은 그다지 왕성하지 못했다.

     세종 때의 기록에 격검에 관한 기록이 있어 조선 초기에는 검술이 매우 발달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무비(無備)에 대한 인식이 높아서 병법이 개발되고 무기가 개량되어 국방력이 크게 강화 되었다. 그래서 세종 때에는 정군이 약15만에서 30만명 정도였고, 봉족과 잡색군을 합하면모두 80만에서 100만 정도의 군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영토를 넓히고 왜구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강한 국방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며 당연히 검술에 대한 기법도 동시에 발달되었다.

     그러나 세조 이후 선조때 까지는 무예에 대한 인식이 약하여 임진왜란을 겪게 되었다. 또한 조선이 왕권의 존립을 위하여 실시한 사병제도 혁파는 조선시대 무예의 약화를 가져 왔으며,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로 이어지는 강인한 무인정신을 계속적으로 퇴화해 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양반 관료체제는 더욱 더 숭문천무(崇文賤武)의 경향이 깊어만 가는 역기능의 체제로 정착되었으며, 조선무예 발전에 지대한 걸림돌로 작용하게 되었다.

     조선의 왕위가 계승되면서 서서히 국방력이 약화되어가고 중국에 사대하면서 자국의 무비(無備)는게을리 하였으니 조선의 무예는 차츰 사장되어 가고 있었다. 또한 학문의 파벌이 권력다툼으로까지 확대되면서 조선의 국방력은 방어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아무런 준비 없이 임진왜란을 겪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조선의 백성들은 왜구에게 처참하게 당하게 되었다.

     일찍기 율곡 이이는 왜인들의 침략에 대비하여 10만의 군사를 보강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른바 10만양병설이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당파싸움으로 인하여 충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임진왜란을 당할 때의 검의 제련기술은 발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뒷걸음질을 하고 있었다.

    한교의 도검과 검술의 발전 상태에 대하여 그 시대 실정을 말하는 대목이 있다. 「창과 칼은 헛되이기기만 있고 쓰지 않는다. 창고에 창과 칼이 쓰지 않아 녹슬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그 당시의 도검의 제련기술의 수준을 한눈에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조정은 양반들의 당파싸움에 휘말려 전혀 무비(無備)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다가 임진왜란이일어나자 그 때야 허겁지겁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이순신장군은 앞으로 다가 올 전쟁에 대비하여 나름대로 군사를 훈련시키고 전투에 사용할 무기와 거북선 등을 제조하였고 대포를 제작하였다. 또 이무생, 태귀련 등의 도공들에게 명하여 질 좋은 환도를 만들게 하여 군사들에게 지급하였으며 지금도 경주 국립박물관에 그 당시 제조한 명검이 보관되어 있다.

    선조때 왜적을 물리쳐 공을 세우고 나중에 훈국랑이 된 한교선생은 검술의 일인자로서 검성(劍聖)으로 불렸으며 나라에서 그 공과 높은 무학(武學)을 인정하여 국사(國士)칭호를 받게 되었다.

     한교선생은 약화되어 가는 조선무예를 부활시킨 장본인이며 조선무예사에 길이 남을 인물인 것이다. 한교선생은 임진왜란 때 중국에서 원정 나온 장수에게 묻고, 또 모원의의 무비지(武備誌)등을 참고하여 1598년(선조31년)에 《무예제보(武藝提譜)》를 편찬하여 잃어버렸던 한민족의 전통검법인 본국검을 되찾아 후세에 기록으로 남기므로 해서 조선무예 발전에 큰 힘이 외었으며, 또 1790년 (정조14년)에정조의 명으로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 등의 의해《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편찬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이 이 무예도보통지를 훈련교본으로 삼고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사를 훈련시켜병법을 튼튼히 하였다. 특히 이 무예도보에 왜검의 기법을 수록하여 적국의 기법을 연구 분석하여 습득케함으로 해서 왜(倭)의 재 침입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또 이 책에 검의 제조기술을 수록하여질 좋은 환도를 만들어 군사들이 사용하게 하였다.

     무예도보통지의 예도(銳刀)편에 보면 「중국은 비단 검술뿐만 아니라 그 사용하는 칼도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 모원의는 검술이 전해지지 않음을 탄식하고 그 법을 조선에서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대저 검(劍)의 형식은 옛 법이니 지금은 요도(腰刀)로 사용된다. 그래서 그 명물과 함께 단철법을병행하여 기록한다.」라고 하였으며 도금의 제조술을 기록하고 있다.

     모원의가 말하기를, 「쇠는 많은 담글질을 해야 한다. 칼(刀)은 순강을 사용해야 한다. 칼등에서부터 칼날까지 평산을 이용하여 평평하게 깎아야 한다. 칼날의 끝은 갈아서 날카롭게 하고 묘를 살려 뽀죽하게 한다.

    최근에 장인들은 칼날을 벼르는데는 두드리는 것을 주로 사용하고 평산으로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칼끝을 가로로 갈아서 예리하게 하고 칼날 양편 아래에 날을 잘 세우지 않으면 찍어도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칼날과 칼끝이 무너지면 완철이며 칼은 손에 쥐기에 알맞게 가벼워야 사용이 용이한 것이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강철에는 생철(生鐵 ), 협철(挾鐵), 숙철(熟鐵) 세가지가 있다. 정철(精鐵)은 백번 담글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 철은 서남해 산중에서 나온 것으로써 자석영과 같다. 무릇 도(刀), 검(劍), 도끼 등은 이 강철이다. 철 중에는 단단해서 두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 이것을 철핵(鐵核)이라 하는데 향유를 발라 태우면 곧바로 흩어진다. 왈, 논에 도랑을 파서 물을 대어 고이면 기름과 같은 것이 생기며 진흙색이나 황금색 등의 물질이 생긴다. 이것을 추운 겨울에 거두었다가 유철이 벌겋게 달아 오를때 2~3차 던져 넣으면 그 강하기가 목을 자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내용을 볼 때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을 겪으므로 해서 도검의 제조술이 매우 발달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도검 제조기술이 뛰어난 일본인들도 임진란때 조선의 기술자들을 강제로 데려가서 그 기술을 전수함으로 해서 발전되었던 것이며 그로 인하여 조선은 기 기술을 보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은 영ㆍ정조 때에는 군대 개편을 시행하여 군사력이 중강 하였으나 또 다시 태평시대가도래하면서 무비에 대한 준비를 등한시 하였으며 당파싸움에 휩싸여 무예의 쇄퇴기에 접어 들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 임오군란 이전까지는 조선군대는 무예도보를 교본으로 하여 검과 창, 활을 중심으로무예를 연마하였으며 임오군란 이후에는 구식군대가 해체되고 신식군대에서 총이 군대의 무기로 등장하였고, 갑오경장에서는 칼과 죽창을 농민군의 주무기로 하여 일본의 소총부대에 맞서 용감히 싸웠다.

     조선말기에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파악하여 잘 대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무비에 대한 준비도 형편없었으며, 조정은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 왜인들이 조선을 강제 점령하여 조선은 나라도 잃게 되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한 이후에 조선의 검술은 조선 무사들에 의해 산속으로 은거하여 연마되거나독립투사들에 의해 그 기예가 전래되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전수해 간 검술과 검 제련 기술을 일본식으로 발전시켜 우리나라에 다시 도입하여그들의 침략도구로 사용하였다.

     명성왕후를 살해한 일본낭도는 닛본도를 사용하여 사해 하였으며 일본 깡패들과 헌병도 칼을 사용하였고, 일제 말기에는 학교의 교사들도 칼을 차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무단 정치를 하였다

    이 시대의 우리 검은 일본에 의하여 외부적으로는 명맥이 끊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은 우리 무예를 철저히 통제하였으며 검술도 통제하여 찬란한 민족의 검은 그 빛을 잃게 되었다.

     

    4) 신라시대 황창의 사실(事實)

     본국검의 검세가 기록으로 전해 오는 것은 조선시대 병서인《무예도보통지(1790년 조선 정조 명선)》이지만 그 원류는 신라의 황창부터 라고 전해진다. 조선때 이첨이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본국검법의 실연을 직접보고 느낀 점을 기록한 내용과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황창은 신라인으로 나이 일곱에 백제에 들어가 칼춤을 추었는데 백제 사람들이 칼춤을 구경하러 많이 모여들었다.

    백제왕이 소문을 듣고 궁중에 황창을 불러 칼춤을 추게 하니 칼춤을 추던 중 왕이 방심한 기회를 노려 왕을 찔렀다. 이에 백제인들이 그를 죽이니 신라인들은 황창의 충성심과 그 정신에 감복하여 슬퍼하였다.

     신라인들이 이후 황창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가면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추었는데 지금도 경주지방에는 칼춤이 전하여 내려온다.」 또한 「일본은 신라와 가까워 신라의 검술이 전승되었을 것이다.」 라는 대목도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칼춤’은 무예를 연구하는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볼 때 무용형식의 칼로서 춤추는 형식이 아닐 것 이다. 황창은 화랑무사의 한사람으로써 고도의 실력을 갖춘 검술의 고수이다. 그러므로 그의 몸놀림은 매우 신속하고 유연하였을 것이므로 일반사람들이 볼 때는 ‘칼춤’으로 인식할 수도 있으나 황창은 검술의 기예를 터득한 사람의 몸놀림인 검형(劍形), 즉 검법의 투로(套路)를 펼쳐 보였던 것이며, 이러한 행위를 사람을은 ‘칼춤’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또한 후세에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추모하기 위해서 가면을 쓰고 춤을 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에는 나이 7세에 백제에 들어가 칼춤을 추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첨의 이야기는 황창의 나이가 15세나 16세쯤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아마 이첨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검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나이 7세에는 검술의 고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첨이 밝힌 황창에 관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을축년 겨울에 내가 경주에 손님으로 갔는데 배공(裴公)이 향악을 베풀어 나를 맞이하는데 탈을 쓴 어린아이가 칼춤을 추는 것으로 보아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라에 황창이라는 소년이 있었는데 나이는 15세나 16세쯤 되었는데 왕에게 백제왕을 죽이기를 원하니 왕이 허락하여 백제의 시가(市街)에서 칼춤을 추는데 사람들이 모여들어 구경하였고 소문을 들은 백제왕이 불러 칼춤을 추게 하였다. 황창이 칼춤을 추다가 기회를 노려 백제왕을 찌르고 잡혀 죽었다. 황창의 어머니가 듣고 울다 눈이 멀었는데 신라사람들이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여 눈을 뜨게 하려고 칼춤을 추어 ‘황창이 춤을 춘다. 예전의 말은 거짓이다.’라고 하니 그의 어머니가 기뻐 눈이 맑아졌다 한다.」

     이첨이 고증하기를 「내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니 모든 내용 중 어린 소년이 적국의 왕을 죽였다는 기록이 없으니 사리에 맞지 않다. 그러니 관창의 이야기를 미화시킨 것이다. 관창이야말로 춘추시대의 노나라 소년 왕기(王錡)와 함께 두 명뿐인 소년 영웅이다. 추후 황창의 춤을 보고 이를 위해 고증한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조선시대 병서인 무예도보통지의 본국검 전문을 보면 황창이 화랑들에게 검법을 습득하게 하였다고한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무예도보통지》의 기록이 다소 차이가 있으나 신라의 전설적인 검무의 원류임에는틀림없다.

    신라의 황창이 화랑의 일원이었든, 관창의 전설이었든, 신라 화랑도의 검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 만은 분명하며 본국검의 원형 전파자일 것이다.

    따라서 《무예도보통지》의 기록을 해석하면 황창랑(黃昌郞)은 검술을 집대성한 고도의 검술가임을 알 수있다.

     

    5) 화랑도(花郞徒)와 본국검(本國劍)의 관계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나라 화랑제도는 태초의 한국시대부터 시초가 되어 배달시대에 소도가 있었고, 오상지도로써 계율을 세웠으며, 단군조선시대에는 국자랑과 천지화랑이 있었으며 충,효,예,인,용의 오상지도로써 육기(六技)를 교육시켰다. 육기 중에 검술은 가장 중요한 기예였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검이 전투 수단의 주무기였으며 가장 직접적인 전투장비였던 것이다. 따라서 검술의 기법도 나름대로 발달되어 있었던 것이며, 소도에서 육기교육을 조직적으로 실행하였다는 것은 그 당시의 검술기법도 어느 정도체계를 갖추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렇다면 신라시대의 황창은 본국검의 기예를 자신이 직접 창안해냈던것일까? 아니면 그 이전부터 기법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시대에 완벽하게 체계화를 이루었던 것인가? 기록상으로는 신라시대의 황창이 본국검의 효시라고 하지만, 화랑도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본국검이 뒤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조선시대에도 화랑제도 속에 본국검의 기법이 사용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화랑도는 본국검과의 불가분의 관계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즉, 화랑도와 본국검은 활과 화살의 관계와 같다. 활이 있으되 화살이 없으면 그것은 무용지물이 되는 것과 그 이치가 같다.

      따라서 화랑도의 역사는 본국검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

     《무예도보통지》의 본국검편에 보면 「황창(黃倡)은 황창(黃昌)이라고도 한다. 곧 신라에 설치하였던 화랑(花郞)이다.

    신라의 군신들은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보는 근심이 없다. 미모의 남자를 장식하여 화랑이라 부르는데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간사하고 정직함을 알아보고 가려서 쓴다. 술랑(術郞), 영랑(永郞), 남랑(南郞), 안상(安詳)의 사선랑(四仙郞)이 이와 같은 이들이다. 그런고로 황창랑이다. 화랑의 도중(徒衆)이 수천이나 되는데 서로 충성과 신의를 닦았다.

     또 신라는 왜국에 이웃하고 있으므로 그 춤추는 칼들이 반드시 전해졌을 것이나 상고할 수 없다. 이제 황창랑으로 인하여 본국검의 연기(緣起)가 된다.」

    모원의(茅元儀)도 검보를 조선에서 얻었다고 생각된다. 「이에 서역(西域)의 등운(等韻)에 비하였음은 이는 조선이 스스로 본국의 보를 창안한 것이다」 라는 대목이 나온다. 따라서 본국검은 민족 화랑도들의 심신수련과 구국충정을 위한 검법이었다.

     《화랑세기》의 화랑의 정의에 대하여 《삼국사기》에 의하면 화랑제도는 진흥왕 37년(571)에생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를 보면 진흥왕 원년(540)에 남녀 아이들을 뽑아 풍월주라고 하였고, 또 아름다운 소녀를 뽑아 원화라고 하였으며 바로 남모와 준정이 화랑의 시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증왕 때 이사부가 가야국과 우산국을 정벌하였고 551년 거칠부의 무공과 55년 사다함의 전공을 든다면 화랑의 뿌리는 훨씬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 진흥왕 37년 이전에 이미 화랑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화랑이란 신라 귀족의 자제 중에서 인물이 수려한 청소년을 뽑아 문무를 가르치던 집단으로 삼국통일의 근간이 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화랑들은 도의를 서로 연마하고 심성을 순화하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수양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충성, 효도, 신의, 용기, 인서에 해당하는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중요한 정신으로 삼았다.

     화랑에 대한 명칭은  〈국선도〉〈풍월주〉〈원화〉〈풍류도〉등이 있었으며 이를 종합하면 나라의 꽃이라는 뜻이 된다. 화(花)는 여자이고 랑(郞)은 남자이다. 이러한 화랑은 신라 교육의 현묘한 도(道)로써 유 孺, 불 佛, 도道의 이념을 함축한 이상적인 문무기예(文武技藝)의 조직체제이다.

     그리하여 화랑도는 우리나라의 무사 및 선비정신의 뿌리가 되었으며 중국의 신사도(神士道)나 서양의 기사도처럼 신라의 정신이자 힘이 되었으며 우리 한민족의 상무정신의 표상이 되었다」라고 말하고있다.

     또 《삼국유사》 권1 김유신 편에 「진평왕 17년(595)년에 태어났다. 칠요(七曜: 해, 달, 5성 또는 7성)의 정기를 타고 났으므로 등에 칠성(七星)의 무늬가 있고 신기한 일이 많았다. 나이 18세가 되던 임신년에 검술을 닦아 국선(國仙)이 되었다」라고 되어있다.

     《삼국사기》권제41열전 제1김유신 편에「건복29년(612)에 이웃나라의 적이 한층 더 핍박해왔으므로 공은 더욱 웅대한 뜻을 나타내어 홀로 보검(寶劍)을 가지고 인박산의 깊은 골짜기 속에 들어가서 향불을 피워 놓고 하늘에 기도하니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보검에 여물한 기운을 내렸다. 사흘 째 되는 밤에는 허성과 각성 두 별이 환하게 빛나면서 칼에 내려오며 칼이 움직이는 듯하였다.」라는대목이 나온다. 김유신은 화랑의 한 사람이다. 여기서 검은 화랑도의 주요무기였다. 화랑도는 일상생활에있어서도 검을 차고 다니며 수련에 진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6) 고려와 조선시대의 본국검의 계승

     《고려사》 민유전에 「나라풍속에 어려서 반드시 승을 따라 책을 배우고 연수자가 있으면 승속이모두 받들어 선량이라 불렀으며 유가 열 살에 승사에 나아가 배우며 성품이 민오하고 수서(受書)에통달 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자가 화풍 같고 의가 뛰어나니 보는 이 모두 사랑했다. 충렬왕이 듣고불러 궁중에서 국선(國仙)으로 지목하였다 」라고 전한다.

     이 기록에서 보듯이 고려의 선량은 신라 화랑도의 계승이다.

     화랑도의 정신과 검법의 수련 방법을 그대로 이어 받았음은 물론이고 이는 본국검이 고려로 계승되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고려초기에는 화랑제도가 신라의 유풍을 이어받아 운영되었고 중기에는 이 화랑제도가 두 갈래로 변화한다. 그 하나는 화랑들이 정규 군대로 편입이 되었거나 산무사(散武士)로 남아 활동하였고, 또 한 갈래는 무속의 형태로 갈라진다. 이러한 원인은 화랑도가 지니고 있는 속성 때문이다. 그들은 한편으로는무사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민속신앙을 섬기면서 예악을 즐겼던 것이다. 따라서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의 치열한 경쟁과 투쟁 속에서는 그들이 무장으로서 전장터에서 수없이 출전하여 무인적 기질이 다분하였지만 다소 태평스러웠던 고려시대에는 전투적 기질이 평온으로 인하여 온화해지면서 예약과 놀이를 즐기며 세월을 보내면서 그러한 무속적 측면으로 그 유풍이 정착되어진 것이라 봐야 한다. 한 예로써 오늘 날도 고려의 옛 수도인 개성지방에 무당의 침소로서 선관(仙官)이라는 이름이 남아있다 한다.

     선시대에 와서 이성계가 정권을 잡음으로써 정권유지를 의해 힘 있는 무신들을 배척하였으며, 특히이방원의 사병혁파는 조선조 왕권강화를 위해 무신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문약한 정치가 들어서게 된 동기가 되었다.

     태조 때 공신에게 허락되던 사병제도는 정종, 태종의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자의 난의 근원이었다. 그리하여 정종 2년 사병제도 철폐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문약정치가 계속 지속되면서 숭문천무(崇文賤武)의 경향이 깊어만 갔으며 그로 인해 조선의 국방력은형편없이 쇠약해졌다.

     그 이후에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감히 무서워서 근접도 못했던 왜인들이 당파 싸움과 권력다툼을일삼던 조선의 내부 약점을 파악하여 서서히 침략의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무예도보통지》에 나중에 조선의 무예를 재정립하고 국사(國師)칭호를 하사받은 한교선생의 기예질의 부분에 당시 조정의 군사훈련의 문제점과 무비에 대한 한심하고 무능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나라에는 해외(海外)에 치우쳐 있는 곳이라 예부터 전하는 것은 다만 궁시(弓矢)한 가지 기예만 있고 창과 칼은 헛되이 기기만 있고 익히고 쓰는 법이 없다.

     말 위에 창 쓰는 기예가 있어 비록 시험장에서 쓰이나 그 용법이 자세히 갖추어져 있지 않은 까닭으로 칼과 창은 버려진 무기가 된 지 오래이다. 이 때문에 왜적과 대진(對陣)할 때 왜적이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해 오면 우리 군사들은 비록 창을 잡고 칼을 차고 있어도 칼은 칼집에서 뽑을 시간이 없고 창은 서로 겨루어 보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인 채 흉악한 왜적의 칼날에 꺾인다.」이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을 하지 않은 무능한 조정을 탓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삼국시대의 그 강인한 기백은 모두 다 어디 갔는가?

     한교는 척계광의 기효신서(1584년 선조 17년에 명나라 척계광의 8기를 수록한 책으로 창, 패, 선, 곤, 파, 권, 도, 조선세법으로 이루어졌다. 창은 「양가팔모창법」곤은 「검경」을인용하였고 조선세법은 조선에서 구하였다)를 참고하여 《무예제보(1598년 선조 31년 곤봉,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쌍수도)》를 편찬하는 동시에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도제주에 유성룡, 대자에 조경을 임명하고 훈국랑 한교는 특히 살수에 관한 것을 주역하였다. 한교의 《무예제보》는잃어버렸던 한민족의 무예를 되찾는 계기가 되었고 나중에 《무예신보》, 《무예도보통지》를 제작하는근간이 되었다.

     1759년(영조35년)에 《무예신보》를 편찬했는데 이는 사도세자의 명으로 《무예지보》의 6기에 12기를 더하여 18기를 수록한 것이다. 죽장창, 기창, 예도, 교전, 본국검, 제독검, 월도, 협도, 쌍검, 권법, 편곤등 12기도 추가기록 하였다.

     1790년 (정조14년) 《무예도보통지》를 발간했는데 이는 정조의 명으로 조선시대 실학자 박제가, 이덕수, 백동수가 편술하였다. 무예신보에 6기(기창, 마상월도, 마상쌍검, 마상편곤, 마상재, 격구)를 더하여 24종목으로 하여 24반 무예가 되었다.

    《무예도보통지》는 한국, 중국, 일본 삼국서적 220종을 바탕으로 하여 편찬되었으며, 4권 4책으로그림과 보의 해설로 이루어진, 동양삼국에서 가장 대작으로 평가 할 수 있을 정도의 종합무예서로서 특히 본국검법 부분은 섬세하고 체계적으로 잘 구성되어있다.

     그 내용에 명나라 대장주 모원의(1594~1640)가 쓴 《무비지(武備志1621년 간행)》권 ‘86검법편’에 보면 본국검법을 「조선세법」이라 칭하고 예도(본국검의 종류)24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나온다. 이 「조선세법」 24세는 동양삼국의 검법의 기초이며 뿌리이다. 따라서 일본 검도의 기법도 조선세법 24세에서 유래된 것이다.

     조선세법은 《무비지》의 기록을 근거하면 모원의는 이 비결을 조선에서 얻었다 한다. 그 내용은 「조선의 세법은 처음에 안법(眼法), 격법(擊法), 세법(洗法), 자법(刺法)을 익힌다. 격법에는표두격(豹頭擊), 과좌격(跨左擊), 과우격(跨右擊), 익좌격(翼左擊), 익우격(翼右擊)의 자법에는역린자(逆鱗刺), 탄복자(坦腹刺), 쌍명자(雙明刺), 좌협자(左夾刺), 우협자(右夾刺)5가지가있고, 격법(格法)에는 봉두세(鳳頭勢), 호혈세(虎穴勢), 등교세(騰蛟勢)의 3가지가 있다.」이와같은 조선세법은 기법의 세밀함과 체계적인 면은 타국의 추종을 불허하는 만큼 우수성을 지니고 있으며 기본법을 바탕으로 하여 24세로 분류되어 있다.

    또한 《무비지》의 기록은 예도 24세로 되어있으나 《무예도보통지》의 기록은 28세로 증보되어 있다.

     이것은 무비지의 24세에 다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자 박제가, 백동수 등이 옛 것을 수집하고 증보하여 좋은 기법을 취한다고 했으니, 보충된 태아도타세(太阿到拖勢), 여선참사세(呂仙斬蛇勢), 양각조천세(羊角弔天勢), 금강보운세(金剛步蕓勢)는 편찬자들이 그 당시에 전래되는 우수한 기법을 수집하여 보강하므로 해서 기존의 세법을 더욱 더 확고하게 체계를 정립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모원의가 만든 무비지를 창출하는 과정에서도 본국검의 조선세법이라고 하여 매우 중요시한 것으로 보아, 신라의 본국검은 동양검술의 기초가 되는 뛰어난 검술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모원의가 본국검을 기초로 하여 중국의 검법을 발전시켰으며 그 모체는 바로 「조선세법」인 것이다.

     

    7) 본국검의 현대적 계승

     천하의 그 공적이 길이 남을 공을 세운 성웅 이순신장군, 임경업장군, 임진왜란때 의병장 곽재우장군, 김덕령 장군등은 자타가 공인하는 본국검법의 달인이었다. 지금도 의령 곽재우 장군의 유물전시관에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격퇴할 때 사용되었던 본국검이 전시되어  있고, 경주 국립박물관에이순진장군이 직접 소장한 왜적과의 해전에서 적을 섬멸할 때 사용하였던 장도(長刀 전장6자5치, 무게2근8량)가 전시되어 있으며 병자호란 때 민병대를 이끌고 청태종의 10만 대군을 격퇴한 임경업장군의검술은 당대 제일이었으며 중국의 검술을 능가하는 수준이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조선 정조가 《무예도보통지》를 발간한 이후로 조정에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체계적으로 군사훈련에 본국검을 도입하여 군사력을 증강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조선중기 이후에 와서는 서양문물의 국내 도입으로 인해 새로운 무기가 도입되었다.

     그 대표적인 무기가 조총이었다. 조총의 도입으로 인하여 검법의 기예는 다소 약화되었으나 가까운 백병전에는 검법을 사용하는 것이 유리함으로 해서 본국검법의 기예는 전수되고 있었다.

     조선중기 이후에는 보군(步軍)의 무과시험에 한 과목으로 채택하여 실전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고조선말기 고종의 군제개편으로 인하여 1896년(고종33년)에 경무청에서 경찰훈련과 무관학교를설립하여 군사훈련과목으로 본국검법을 선택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

     조선말기 일인들의 국내침략으로 인하여 뜻있는 항일투사들이 조직적으로 일인들에 대해 대항했는데그것이 바로 「본국검문」이란 무사조직이다. 이 항일저항조직이었던 「본국검문」 조직은 현재까지의본국검이 계승되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매우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는 1907년에 대한제국을 침략하기 위해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함으로 해서 사병들은 분산하여 의병에 가담하여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워 수많은 의병들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이후 이 조직의 일원들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에 독립군 조직에 가담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현재 대산총사(大山總師)의조부이신 이현길 선생(형제가 세분이데 2분은 의병 활동을 하다가 미혼의 나이에 사망하셨다)도 본국검문의 조직원으로 강원도 철원 항일전투에 직접 참가하여 공을 세우셨다.

     조부 이현길 선생은 통일신라의 도읍지이며 화랑도의 수련터였던 경주에서 양조장을 경영하셨으며 독립운동에 가담함으로써 일인 순사의 표적이 되어 창원군 동면 덕천리 34번지로 내려와 은둔생활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몇 년 전 김해에 살고 계시다가 작고하신 대산총사(大山總師)의 삼촌인 이덕룡옹은 “일제침략기에 부친께서는 평소 석가래 위에 감춰둔 본국검과 장총을 꺼내서 잘 손질하고 감춰두곤 하셨다.”고 회고 하신다. 조부에게 본국검을 전수받은 대산총사의 부친은 그가 10세가 되는 해부터 무예에 입문시켜 본국검중 가장 중요한 기본검법인 예도28세를 맨손무예와 함께 가르쳤다. 조부의 민족정신과 호국 혼을 부친으로부터 계승받은 대산총사는 10세 때 전통무예에 입문하여 전통무예를 전수 받은 이후에 60년 간 오로지 외로이 무예의 길을 걸어왔으며, 한민족 전통무예의 계승발전을 위해 각고의 고통을 견디며 고독한 수행을 감내하였으며, 전국을 순회하면서 비전되어 온 기법을 수집하여 연구하였고, 입산수도를 통하여 더욱 더 높은 무예의 경지를 터득하여 예부터 전래되어 온 기법과 자신이 체계화 시킨 기법을 집대성하여 현대인의 심신수양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재편성하고 한 차원 높게 발전시켜서 완벽한 무예체계를 이룩하였다.

    그리하여 1980년 초 봄에 민주성지 마산시 회원동에 민족무예 본국검의 전수도장을 설립하여 오늘날까지 약 60 여 년 간 오직 민족무예의 보급과 계승에 여념이 없었으며, 그리하여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시켰다.

     현재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 전수관이 200여개 있으며 그 회원수가 10만 여명에 이르고 있고, 해외 미국지부, 캐나다지부, 맥시코지부, 아르헨티나 지부, 칠레지부, 덴마크지부, 네들란드지부,  스페인지부 등에 지부가 설립되어 본국검을 전수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