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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본국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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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랑본국검의 정의

    고객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본국검 대한본국검협회
    고객이 먼저 자랑하는 본국검이 되겠습니다.

    화랑본국검은 기본 수련으로 체력을 단련하고,
    화랑본국검은 우리고유의 무술입니다.

    본국검의 기원은 인간이 칼을 사용한 역사와 같이한다. 금석병용시대에 들어와 한반도와 남만주에 걸쳐 있었던 군소국중에서 마한은 검, 궁, 시, 모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 중에서 옥저는 모를 가지고 보전을 잘했다 했고, 낙랑에서 근궁이 나왔다고 한다. 여기서 궁시(弓矢), 도(刀), 모(子)는 이들의 공통된 병기였는데, 원전(戰)에는 궁시를 썼고 근전(近)에는 도와 모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병기들은 삼국시대에 이르러 더욱 발전하였고 신라의 경우에는 화랑제도가 있어 다른 어느 곳보다 검술이 발전하였다.
    본국검은 고조선시대부터 전부 무예로 계승, 발전되어오다가, 특히 삼국시대에 화랑도들을 중심으로 무술 연마를 위하여 사용한 우리 고유의 검술이다. 조선 정조 때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가 편찬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본국검으로 수록 되었으며, 속칭 신라(新羅劍) 또는 신검 이라고도 한다.
    <동경잡기 (東京記)> 풍속도에 의하면, 황창(唱)이라는 신라 소년이 백제왕 앞에서 검무(劍)를 추다가 왕을 찌르고, 자신은 백제인들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는데, 신라 사람은 이를 슬퍼하여 황창랑의 모습을 그린 가면을 쓰고 검무를 추는 풍속이 지금도 전해 온다고 하였으며, <무예도보통지>에는 황창랑의 검술로부터 본국검의 술법은 실전(失傳)되어 오래도록 전하지 않다가, 중국의 모원의( 義)가 조선의 옛 검법인 <조선세법(朝鮮勢法)>을 우리나라에서 찾아 (무비지(武備志)>에 채록함으로써 <무예도보통지>에도 그 검보(劍)를 수록하게 된 것이다. 이 본국검법은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정조 당시에도 이미 잊혀져서 그 세법을 알지 못했는데 (무비지>에서 비로소 되찾게 되었다. 그래서 <무예도보통지>에 설명하기를 모원의가 얻은 검보는 세법이 구비 되어 있으며, 이것은 조선이 자기 나라의 검보를 창안한 것이었을 터인데 어째서 스스로 전하지 못하고 스스로 익히지 아니하여 중국의 모원의에 의해서 전하고 익히게 되었는지 알지 못할 일이라고 통탄하고 있다.
    옛날에는 검 과 도(刀)를 구별하여 양쪽에 날이 있는 것을 검이라고 하고, 한쪽에만 날이 있는 것은 도라고 하였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 검과 도를 혼용하게 되어 보통 칼이라 하면 도(刀劍)을 총칭하였다. 본국검은 허리에 차는 칼인 요도(刀)로 하는 검술이다. 요도의 무게는 12 8량으로 약 1kg이며, 이 칼을 가지고 검무를 출 때에는 한 손으로 자루를 잡고 휘두르기도 하지만 실전(實戰)에서는 자루를 두 손으로 꼭 잡고 쓰게 된다. <무예도보통지>의 본국검 자세가 모두 칼을 두 손으로 잡고 있는 그림으로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검법은 안법(眼法), 즉 시선을 쓰는 법을 우선 배우고, 칼로 치는 격법(法), 칼로 베는 세법(法), 칼로 찌르는 자법(法)을 익혀야 한다. 본국검은 동작이 32세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중에 안법 6수, 격법 5수, 세법 4수, 자법 7수 등의 32수와 이밖에 지검대적세(劍城) 같은 기본자세 및 내략(內) 외(外)같은 방어법이 들어 있다.
    <무예도보통지>의 본국검 검보와 총도(總圖)에는 검법의 운용을 순서에 따라 자세를 그려 놓았으나 세법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결여되어 있어서 실제로 그 전체의 묘(妙)를 터득하기가 어렵다. 이것은 모원의가 조선에서 입수했다는 조선세법을 그대로 <무예도보통지>에 옮겨 놓은 때문이다. 또한, 편찬자가 본국검법에 관하여 조예가 깊지 못하였다는 데도 원인이 있다.
    이 본국검은 조선 중기 이후 보군의 관무재초시(觀式 ) 시험과목으로 시행되어 전투에 실용되는 검술로 실시되었다. 고종 때는 군제(군제)를 개혁하여 1896년(고종33년)에 경무청에서 경찰훈련과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군사훈련 과목에 검술(격검)과목이 채택되어 교육을 실시하였으나, 이후 조선은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의 주권을 잃으므로 해서 일본은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식의 검도를 조선학도들에게 강제교육을 시켰으며, 일인교사들은 닛본도(日本刀)를 차고 강의를 하였다. 따라서 일본검도의 도입은 한민족의 정신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침탈의도가 숨겨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가 1907년에 대한제국의 침략이 보다 쉽게 이루어지도록 하기위해 국방의 의무를 맡고 있는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고 격검 교육을 받은 군사들은 의병이 되어 대일항전에 적극적으로 가담함으로 해서 민족화랑무사도의 주체인 본국검법은 개별적으로 가전무예(가전무예)나 무사조직(무사조직) 등의 형태로 매을 잇고 있었다. 본국검의 수련과목은 선법, 기공술, 수박(맨손무예) 등으로 기본수련으로 체력을 단련한다음, 본국검의 기초과정, 배달검, 화랑검, 예도28세(조선세법), 격검부터 수련하고, 유단자가 되면 태극12지검, 곤방(봉술), 환교장도, 장도, 쌍검, 예도, 협도, 원도, 마상 쌍검, 마상 월도등 다양한 기법을 수련한다.
    (참고문헌》 무예도보통지, 무비지 (모원의), 도검록, 동경잡기, 대전회통